예수가 없는 하나님

예수가 없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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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아이들의 맑은 웃음과 아름다운 눈동자 뒤에는 배고픔이나 빈민의 고통이 묻어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문화나 영적인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배고 푼 아이를 먹이는 것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이 글은 남아공 선교사로서 현지에서 삶을 나누며 캠페인을 통해 겪은 일들과 배운 것들을 정리한 연구 결과이다.  2009년 가족들과 함께 남아공에 있는 아이들을 섬기기 위해 이주했다.  아내가 몬테소리 교육자 양육 사역을 시작하고, 동시에 어린이교회를 시작했다.  어린이 교회는 1년 안에 150명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11세에서 14세의 아이들 12명과 함께 청소년 사역도 시작했다.  하지만 6개월도 되지않아 12명 중 남자 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하나가 강간을 당했고, 그 아이들이 잘 자라나는 것을 바라 보겠다던 희망은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전환점

이 일을 계기로 우리의 삶은 전환점을 겪게 된다.  적지 않은 충격을 넘어서며  선교사로는 겪을 수 없었던 이곳의 거친 현실에 노출되고 있었다.  주민들은 강간당한 아이들을 하나 둘 나에게 데리고 왔고  강간당한 청소년이나 어른들을 넌지시  가리켜주었다.  그러나 주민 누구 하나도 자기 지역의 모든 성범죄 피해자를 다 알고 있지는 못했다.  다 기억하기에는 피해자들이 터무니 없이 많았고, 다수의 피해자들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옵티머스 연구 결과(2016)에 의하면 2015년 한해 청소년(15-17살)들 중 351,214명이 성범죄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비교하자면, 2014년에 고등학교 졸업생은 403,874명이었다.  차츰, 천문학적 수의 피해자들 뿐만이 아니라, 강간범과 피해자의 가족그리고 친구들도 심각한 파생적 피해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해소되지 않은 정신적 고통이 가족 간, 남녀 간의 관계에 심한 단절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광범위하게는 인간 가치관과 존엄성에 큰 손상을 주었고, 아직 까지도 사회의 많은 부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있다.

 I’m precious to Jesus

2011년, 아내와 함께 ‘나는 예수님께 존귀한 존재입니다’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강간 피해자의 아픔에 동감하고 그들의 황폐해진 자존감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시작한 사회 운동이다.  아이들과 함께 ‘음나 인디사 비세킬레 쿠예수 (나는 예수님께 존귀한 존재입니다의 코사어)’라 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가정 방문과 행진을 하며 알렸다.  외국인들과 현지인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어 캠페인 메시지는 빠르게 퍼져 나갔고, 캐나다, 미국, 독일, 한국, 일본 오스트리아등 세계 각국에서 교회들과 개인들이 후원을 해주셨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캠페인 셔츠를 입은 우리들을 쫓아와 질문을 하는 경우도 수 없이 많았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폭력 항거에 익숙한 나라에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난 존귀한 존재입니다’라 고 외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고 많은 아이들이 셔츠를 매일 밤 세탁을 하여 다음날 입을 만큼 아이들에게는 큰 기쁨의 캠페인이 되었다.  이 셔츠는 아이들을 해하거나 강간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지는 강한 경고이면서, 남성 우월주의 문화와 전통 종교 안에서 아이들과 여성들의 자존감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는 의도였다.  지난 6년 동안 레소토의 한 지역을 포함한 남아프리카 20지역에서 4800장 이상의 셔츠를 아이들에게 입히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행진을 했다.  캠페인을 통해 멍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들어내며 눈물로 아픔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며 하는 말은, “오래 기다렸어요.  이제야 뭐 라도 할 수 있겠네요.”

선한 자들의 모임

지난 6년간, ‘이런 사회적인 현상의 원인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쉬지않고 했다.  편견 없이 그러나 민감한 자세로 공포에 눌려 닫혀있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들이 나누어 준 아픈 이야기들은 오용을 막기위해 섬세히 비밀리에 다루어졌으며, 중요한 이야기들은 가까운 동료들에게만 필요 하에 나누었다.  가정환경에서 전통 종교까지 가능한 원인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질문을 하고 파헤쳐 보았다.  크고 작은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가장 염려 되어지는 것은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선한 자들의 모임(RMA)이었다.  이 모임은 침묵하는 선한 마음을 가진 남성들을 세미나와 정기적인 모임을 통하여 일으켜 세우고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코사(원주민) 남성의 전통 상과 미덕을 바탕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행동으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선한 자들의 모임은 많은 사람에게서 눈물 어린 자각을 일으켰고 많은 이들이 동참했다.  많은 남성들의 진심 어린 동참으로 더 깊은 현실과 사실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바랬던 결과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  여러 지역에서 350명 이상의 남성들이 모여 2-3시간에 걸쳐 수업과 토론을 하며 교육하였고,  몇 몇 지역에서는 매주 모임도 진행하였지만 캠페인이 자생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선한자들의 모임(RMA)에 참여했던 많은 남성들이 주변의 비난과 견해 대립이 두려워 선한 자들의 모임의 메시지를 가족들은 물론 가까운 친구에게도 직접 전하는 것을 꺼려했다.  기대했던 성과는 못 얻었지만 각자의 지역에서 변화를 염원하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기독교를 향한 의문

2001년도 통계에 의하면 79.8%의 남아공사람들이 기독교 교단 소속이라 답했다.  무엇이 선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높은 범죄와 강간율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적, 영적 건강상태를 명확이 나타내고 있다.  선교사로서 기독교의 존재성을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80% 에 다다르는 기독교인들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힘없이 강간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을 접하며 경찰에 알릴 수도, 알려보았자  소용없는 상황을 접하며 나에게도 우울증이 오기까지 했다.  길목마다 교회가 있고, 매주 철야 기도 예배가 있다.  많은 목사들이 있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프로그램과 신학교들이 있는데도, 교회에는  수많은 강간 피해자들이 있으며 현재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소문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두려워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나누지 못한다. 아프리칸 교회의 특징인 힘있고 열정적인 찬양 뒤에는 정신적, 영적 고통 속에서 강간 피해자들은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런 모습들을 건강문제나 재정적인 문제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비밀과 침묵

이곳 문화는 신성하다 믿어져 남자들간의 비밀로 간주되고 보호된다.  2015년, 문화를 연구하며 원인을 찾는 중, 우리가 접하는 강간, 미혼 모, 낮은 자존감등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이는 전통 풍습을 알게 되었다. 미팅을 하고 있던 현지인 동역자들과 나는 이 사실을 인식하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 조차도 이런 잘못된 전통 풍습을 문제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의 자아 분석과 반성이 따르는 값진 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노력이 허사가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여성들과 아이들안에서 자존감을 키우고, 바른 생각을 가진 남성들을 움직여 각자 지역에서 변화를 가져온다는 우리들의 계획은 더이상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일단은 이 충격적인 사실의 이해와 정리의 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이 일로 기도 하며 지낸 지 두 주쯤 되는 시점에,  나는 올리아(OLIA)에서  함께 사역하는  친구와 함께 권총강도 3명에게 납치를 당했다.  이 일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으며, 주님께서 나와 동역자들을 살려주신 이유를 생각하며  고통 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 함께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주키사니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전문지식이 있는 분들로 팀이 구성되었다. 이와 동시에 선한 자들의 모임의 주요 멤버들과도 함께 나누고 전략을 모색하였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문화적 자존감으로 강한 반감을 보였으나 그  것의 타락한 모습을 인정하며, 하나 둘씩 마음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몇분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그 전통 풍습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비디오 인터뷰에도 응해주었다.  그 전통 풍습은 지역마다 진행 방법에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몇가지의 정보로 변질된 모습을 일반화 시키기에는 민감한 부분이라, 깊은 이해와 보편적인 정보를 얻기위해 2015년 8월에서 2016년 1월까지 약5개월 간에 걸친 설문 조사를 실시하였다.  질문들은 내가 직접 썼고, 주키사니가 퀸스타운에서부터 마운트 플레쳐까지 설문조사를 떠났다.  주된 목적은 그 전통 풍습의 보편성을 찾는 것이였으나, 여러 질문이 담긴 설문조사를 병행해야했던 이유는 아무리 코사인(남아공의 가장 보편적인 원주민)이라 하여도 마구잡이로 마을을 방문해 풍습에 대해 질문을 하면 큰 반감을 사거나, 거짓 정보만을 얻기 때문이었다.

진실과 협박

주키사니는 한 마을에서 수일에서 일주일 정도를 머무르며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무거운 짐을 든 아주머니들을 돕기도 하고 집을 고쳐 주기도 하며 그들의 믿음을 사기도 해야 했다.  그 전통 풍습의 보편성을 찾는 일은 초기부터 성공적이었다.  다수의 여성들과 여학생들이 불만과 분노로 자신들의 난처한 상황들을 털어놓았다.  여러차례 지역 남자들에게 질책도 당하고 협박도 당했다.  그리던 중 강간 피해자로 보이는 14세 여자아이가 살해당하는 일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을 울분을 토하며 나누어 주었다.  기대 이상으로 확연하게 보편화된  전통 풍습을 확인한 후 우리들은 초점을 설문조사로 돌릴 수 있었다.  설문 답변들은 경험에 비추어 신빙성이 있었고 우리에게 대책을 유출할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143명을 설문한 후 질문들을 교정했다.  퀸스타운에서 마운트 플레쳐까지 5개월에 걸쳐 코사족의 본고장인 트렌스카이에서 498명을 성공적으로 설문조사 했다.

속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

주키사니는 설문조사를 마친 후 우리가 사는 집으로 이사를 들어왔다.  그의 가족들은 직업을 버리고 사역에 만 몰두하는 주키사니가 인생을 낭비하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었다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새 보금자리에 같이 앉아 여행 중 일어났던 일들을 나누었다.  그에게 어려운 여행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살해를 당한 이야기를 할 때는 여러 번 말을 중단을 해야 했다.  14살 여자아이는 아침에 양 때 몰이를 하러 나가던 아이들이 발견을 했는데, 벌거 벗긴 채로 얼굴 가죽이 찢겨 머리위로 넘겨져 있었다고 했다.  한 동안 침묵하고 이렇게 물었다.  “이제는 당신 민족에게 어떻게 느끼나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을 사랑하게 됐어요.  만난 사람 모두가 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망가져 버린 인간관계

그러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울게 하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심하게 망가져 버린 인간관계다.  설문조사에 응한 18-35세 남성분들 중 자신의 아버지 격이 되는 사람이 존경하고 본 받을 만한 분이었다고 답변한 사람들은 4.1% 에 불과하고, 35세 이상의 남성들 중 같은 답변을 한 사람은 1.8%밖에 되지 않았다.  전통적 가족 상이나 가치관은 퇴색되거나 심지어 사라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역 중에 난폭한 10살 짜리 문제아를 만났다.  싸움이 잦고, 학교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하루에 두번씩 아이를 매질 했다.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때리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러 갔는데, 어머니가 아이를 매질하는 이유는 우리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단순히 동네 사람들이 아이때문에 자신에게 불평하는 것이 싫어서 때린다 했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기에게 피해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이들의 마약, 강도 등 불법적인 행동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사람은 강간도 눈감아 준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사역 중에도 도주중인 강간범을 여러차례 가족들이 보호하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 강간범이 직업을 잃자 어머니는 그를 경찰에 신고했다.  그 와중에 주위의 아이들과 여성들은 공포에 떨며 지내야 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무관심과 대인관계에서 받은 깊은 상처들이 많은 사람들을 술과 폭력으로 빠트린다는 함수 관계적인 결과가 나왔고, 이런 세태는 가족과 이웃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다.  망가진 인간관계, 높은 범죄와 강간 율은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들 간의 심각한 단절과 불신을 가지고 왔다.  흔히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대인관계에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전이나 안정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며 살고 있다.  자신의 집에서 조차 불안한 정서적 안정과 안전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갈 때에 주위 사람들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쌓는 다는 것은 가능할까?

부쿠칸예 (일어나 빛을)

매슬로의 Motivation and Personality (1954)에 제시된 욕구단계설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허기를 면하고 생명을 유지하려는 생리적 욕구라고 한다.  그 다음이 위험, 위협, 박탈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회피하려는 안전 욕구라 제시한다.  그리고 안전 욕구가 충족이 된 후에야만 가족, 친구 등 친교와 집단에 귀속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한다.  이 설은 실제 사역에서도 확인되었다.  지난 해부터 이해와 경험을 통해 부쿠간예라는 지역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목적은 서로의 관계 회복과  사랑과 믿음으로 맺어지는 공동체를 세우는 목적이었다.  세 공동체를 각기 떨어진 지역에서 시작했는데 동일한 가르침에 반응이 모두 달랐다.  이를 그룹 A, B, C로 나누어서 설명하겠다.

그룹 A

그룹 A의 참석자들은 생리적 욕구가 만족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가정 구성은 매우 무질서 했다.  많은 미혼녀들과 아이들이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가족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면 집을 떠나야하는 상황의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 같은 집에 사는 형제가 자신들의 아이들을 먹일 때도, 본인의 아이는 못 먹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많은 사람들이 의도에 동감하기보다는 구경꾼들처럼 모였다.  많은 범죄와 강간들이 일어나 그들이 겪는 일들을 같이 해결하며 많은 경험을 했고, 멤버들이 협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지만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먹여 살리는 사람에게 잘 보이거나, 자기를 책임져줄 남자친구나 물질 적으로 도와줄 사람을 찾는데 더 급급하였다.

그룹 B

이 그룹은 생리적 욕구의 문제는 적었으나, 직업과 같은 재정적인 안전의 욕구의 문제가 더 우선인 그룹이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취업 기회를 가져다 주기만을 기다리며 우리를 응원하였다.  적은 수의 가정만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었다.  몇 가정과는 좋은 성과를 얻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업기회만을 기다리다가 실망 하였다.

그룹 C

이 그룹은 어느정도 직업과 가정이 안정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첫 두 욕구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애정 소속 욕구의 갈증이 있었다.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의 필요를 느낀 그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첫 두 그룹(A와 B)은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

패러독스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인관계에 큰 고난을 겪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쿠칸예 세 그룹 모두 주위 사람들에게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 차있고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귀속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메슬로의 욕구단계설과 같이 직업이 어느정도 안정적인 그룹 C는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  여기에 패러독스가 있다.  이곳의 독특할지 모르는 상황은 위험, 위협, 박탈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회피하려는 안전 욕구가 보편적인 심각한 문제인데, 이것은 가난이나 질병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황폐한 대인관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정에서 조차도 안전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고뇌 할 때에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와 같은 대인관계를 발전시키자는 욕구를 어떻게 가질 수 있겠냐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황폐한 대인관계가 계선되지 못하면 그들의 안전 욕구는 충족될수 없다는 것이다.

1차 설문조사에서 얻은 결과에 의하면  자신의 미래를 부정적(불만과 슬픔)으로 답한 사람들 중 19명이 그 이유를 글로 나누어 주었다.  그 중 12명이 직업이 없어서 자신들의 미래가 부정적이라고 답하였다.  75%이상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낙담, 두려움, 슬픔, 외로움으로 답하여 주었는데, 대인관계의 문제나 속한 그룹의 무관심에 그 이유를 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대인관계나 집단 귀속 욕구에 가장 가까운 답은 한 여성분이 남편이 필요하다 한것이다.  하지만, 많은 십대 미혼모와 실직 율을 가만 한다면 남자친구나 남편은 사랑이란 의미보다 많은 여성에게 유일한 생존방법이다.

사람들이 대인관계를 개선 하고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만드는데 관심이 적은 이유는  메슬로의 욕구단계설이 제시하는 것 이외에 이유들이 있다.  남아프리카에는 상고마라고 불리는 조상 숭배 무당들이 안전 욕구를 충족시키는 해결책을 명료하게 공급한다.  옆의 사진은 보편적인 상고마들이 조상신의 힘을 통해 여러가지 문제의 해소를 약속하는 선전문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이 만드는 무티(주술적인 약)은 병을 낫게 하고 여러가지 위협이나 사고를 막아준다고 믿는다.  많은 여성들에게 남자친구나 남편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진의 야마와박사가 내걸은 것은 사람들에게 안전 욕구충족을 약속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은 조상숭배와 의식에 쓰는 음쿰보티라는 전통 술를 빚는 이유는 같다.

예수님이 없는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으로 그들의 황폐한 대인관계를 개선하고 외로움을 달래 그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는데 실패하였다.  아프리카 문화에서 숭배와 경의에 대한 열정과 그 깊이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다.  그들의 문화는 다른 문화와 비교해 조상과 영에 대한 숭배와 경의 표시가 월등히 강하고 그 정신이 많은 의식과 관례에 더 강하게 보편화 되어있다.  우리는 아프리카인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데 실패했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숭배하고 경의 하는 부분에는 쉽게 적응한것으로 보인다.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감화 하고 위안을 받는 것은 사실이긴하나, 그 깊이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나누는 부분에는 성숙하지 못하였다.  사랑의 실천이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 하는 것이 위험, 위협, 박탈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회피 하려는 안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하는 자신들의 전통 종교의 숭배와 경외 의식과 다른 점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과로 그들의 샤머니즘적인 믿음은 기독교로 변화되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가 되어진 것이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 중 64%가 무티(주술적인 약)와 십자가가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고 대답한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며, 86% 사람들이 조상 숭배의 의식의 힘을 부인하지 못하고, 99%에 가까운 사람들이 도덕적인 문제에 가르침을 성경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다고 답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에게 조상신이 아닌 하나님을 숭배하게 하려는데 치중하여,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는 데는 소월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을 새로운 관점에서 

지난 해부터 부쿠칸예(VUKU)라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는 지역과 가정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공동체이다.  근 1년을 고쳐가며 최선의 방법을 찾았다.  초기에는 예수님을 새로운 관점에서 소개하기 위하여 의식적인 기도나 찬양도 생략하고 그들의 하나님을 숭배와 경의의 선입관을 버릴 수 있게 노력하였다.  멤버들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기에  많은 강간 피해자와 마약이나 술에 빠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문제들을 직면 했을 때에 우리는 대인관계 문제로 바라보며 해결점을 찾으려 하였다.  성서적인 가르침을 이용하여 당사자만이 아닌 가족들과 주위사람들에게도 변화를 주려 노력했다.  단순한 문제의 해결점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해와 연민을 갖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고, 많은 장해물이 있었다.  대다수의 멤버들은 대인관계를 개선 하는 방법에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  간단하게 말해 그들은 사랑과 연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경험 한적이 없었다.  서로의 삶에 깊이 관련되어 가면서 서서히 예수님에 사랑의 방법이 짓밟히지 않고 보상받는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침묵하던 선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기 시작했고 우리는 매일 그들을 격려하고 돕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도록

이제 우리가 변해야 하는 시간이다.  나의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가?’ 이다.  그들의 울음을 듣고, 아픔을 느껴야 한다.  정죄함 없이 그들의 진정한 형제, 자매, 그리고 부모가 되어 그들과 깊은 삶에 함께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우리에게 모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들의 상처 난 마음으로 보내셨다.  그들의 마음을 달래고 상처를 아물게 하여 그들의 삶에서 영원히 솟으며 넘쳐나는 진정한 사랑의 선물을 줄 때이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